[동양 천문학 발전사 3] 한국 천문학의 발전사 (고려시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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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천문학 발전사 3] 한국 천문학의 발전사 (고려시대, 조선시대)



1. 고려시대


고려 역법의 기본적인 틀은 822년에 당에서 사용하던 선명력이었으나 원에서 이슬람 천문학을 흡수하여 수시력이 만들어지자 이를 도입하여 사용 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 시대의 천문 역산의 발전은 조선 초에 칠정산이 발간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고려는 개국함과 동시에 신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태복감과 태사국을 두어 천문, 역산 등을 담당케 하였고 이후 이 두 기관이 통합되어 서운관, 관상감 등이 만들어졌다. 이 관처의 관리들은 해를 관찰하고, 역법을 관리하며, 물시계를 담당하고, 시간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천문학 분야의 관리를 직접 교육, 선발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시 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의 ‘역지’에 해시계와 물시계를 사용하여 시간을 결정하는 법이 상세히 나와 있고 일식 시간을 예보한 기록을 보아 분명히 전문적인 시간 측정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동양 천문학 발전사 3] 한국 천문학의 발전사 (고려시대, 조선시대)


고려 시대 천문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11세기 초부터 특히 많이 기록되어 남아 있는 수많은 천문 관측 기록들을 들 수 있다.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에는 ‘첨성당은 만월당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 왕궁이었던 만월대의 서쪽에는 지금도 고려 시대 천문대의 축대 부분이 남 아 있다. 그 축대의 상판에는 관측 기구를 고정하는 데에 쓰였다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구멍이 여럿 있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많은 천문 관측이 이 와 같은 천문대에서 수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천문 관측이 활발했던 만큼 많은 천문도가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나 오늘날에는 천문도가 제작 되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와 석실형 고분에 그려진 벽화만 전해지고 있다. 고려 고분 벽화의 별그림은 고구려와 조선 시대 천문도 사이의 공백을 메워 주는 값진 것으로 고구려 고분 천문도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고려사’의 ‘천문지’나 ‘증보문헌비고’에는 흑자(黑子)로 표기되어 있는 태양 흑점 기록과 적기, 적침 등으로 표현된 오로라 관측 기록이 각각 실려 있다. 이 기록들을 분석해 보면 흑자와 적기 모두 약 11년마다 기록이 반복되는 주기성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알려져 있는 흑점과 태양 활동의 단 주기 11년, 태양 활동의 변화에 의해 조절되는 오로라의 특징과 일치한다. 이는 서양에서 태양 활동 주기를 발견한 때보다 최소 500년 이상 앞선 관측 자료다. 또한 고려의 천문학자들은 일식을 계산하여 그 일어날 시간을 미리 예보하였는데, 이러한 예보가 크게 빗나갈 때에는 처벌을 받았다는 역 사 기록 역시 일식을 미리 예보할 수 있을 정도의 천문 기술 수준이 고려 천문학에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표 3-1에 고려가 남긴 천 문 현상의 종류와 기록 수를 나타내었다.

[동양 천문학 발전사 3] 한국 천문학의 발전사 (고려시대, 조선시대)



2. 조선시대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즉위한지 4년 되던 해에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이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겼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다. 이는 ‘하늘의 황도 부근을 12 지역으로 나눈 '12차'와 이에 대응되는 지상의 지역인 '분야'에 맞추어서 그린 천문도’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천문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이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서양에서 하늘의 별을 바로 88개의 별 자리로 나누는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하늘을 크게 사방과 중앙의 다섯 구 역으로 나누어 다섯 별자리 구역을 다시 중궁 3원과 사방 28수로 나눈 뒤 3원과 28수의 구역 안에 있는 별들은 또다시 여러 작은 별자리들도 세분화 하는 3단계로 구성된 별자리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천 상열차분야지도에는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전 통 천문 지식이 총 망라되어 있는데 특히 각 별자리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 역을 다른 천문도에서처럼 중국의 지명을 쓰지 않고 우리나라의 지명을 사용하는 자주적인 면도 엿보인다.

고려 때의 전통을 이어 조선 왕조는 관상감을 두어 지속적으로 천문 관 측을 하였으며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등으로 관측을 위해 임시 관측대를 파견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열성적인 관측에 의해 발견된 8000개 이 상의 이상 천문 현상은 지금까지 기록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종 시대에는 여러 천문 기구들이 발명되어 조선 시대에 천문학이 가장 발달한 시기라 말할 수 있다. 물시계인 자격루가 발명되었고 물시계 기능과 여러 가지 천문 현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옥루가 발명되었다. 간의는 지름이 2m 정도 되는 간단하고 편리한 천체 위치 관측 기구인데 간의를 가설하기 위한 간의대를 경복궁 안에 세워 관리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관측을 담당케 하였고 이를 대간의대라 하였다. 또한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과 같은 천문 현상이 나타났을 때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규모가 작은 간의대들을 여러 곳에 설치하고 관천대라 칭하였다. 대간의대 바로 서쪽에 세운 동표는 태양 고도 관측 장치로 태양의 고도를 정확히 관측하는 일은 천문 계산법  또는 역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혼천의는 본래 천체 운동 관측 장치로 개발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검은 천 위에 그려진 별자리들이 하루에 한 번씩 저절로 돌게 되어 있고 별도로 태양의 운동이 물의 힘에 의해 자동으로 나타나는 자동식 천체 운동 모형이고 앙부일구는 세종 때 제작된 여러 가지 해시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발 명품이다. 또한 해와 별을 관측하여 시각을 알려주며 낮과 밤에 함께 사용 할 수 있는 시계인 성정시의가 발명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역법서 인 칠정산이 완성되었다. 칠정산이 원나라의 수시력과 이슬람 천문학을 완전히 수용하여 완성됨으로써 일식과 월식을 포함한 천체 운동을 정확히 예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그 당시에 최고의 수준에 달했던 수학적 천문 학을 완전히 흡수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이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 제가역상집, 천문유초와 같은 천문학 서적들이 발간되어 조선 시대 천문학 교육의 기본 참고서로 이용되었다. 조선의 전통 천문학은 임진년(1592년)과 정유년(1597년)의 왜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천 문 의기가 소실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소실되었던 의기 등을 약 200년 의 세월에 걸쳐 복구하면서 조선의 천문학은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나 17세 기 들어 중국을 통해 서양 천문학이 전래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서양의 과학 기술이 명청 시대 및 조선 시대 엘리트 층에 급속하게 파급될 수 있었던 것은 서양 성직자들이 명말 청초에 걸쳐 유교적 한자 문화 권인 한족 사회에 천주교를 전교함과 동시에 서양 문명을 전수하기 위해 서 양의 종교, 윤리와 지리, 천문, 역사, 과학, 기술 관계의 서적을 한문으로 번 역 또는 저술한 ‘한역서학서’라고 하는 책이 전해지면서부터다. 한역서학서 와 함께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 지도 ‘구라파국여지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있지만 이는 후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우리나라의 지도 제작을 자극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에 만연했던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서양식 역법으로 만들어진 중국의 시헌력을 도입하여 17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서양식 방법으로 만든 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리 나라 천문학의 중심은 역법이었고 우주 구조론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으나 서양 역법이 도입되면서 서양의 우주 구조론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는 시헌력이 이미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우주 구조론을 형성하고 있던 중국의 우주 구조론과 상충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 이다. 결과적으로 시헌력의 사용은 서양 천문학 전파의 폭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서양 천문학의 수용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12 중천설과 지 원설 그리고 지전설이다. 17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우주 구조론에 큰 영향을 미친 서양의 12 중천설은 우리나라 전통 우주 구조론인 중천 개념과 거의 흡사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고, 이외에 마테오 리치가 만든 지도가 전파 되면서 네모반듯한 모양이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땅의 형태가 구형으로 확실하게 변화되어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조선 후기 천체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전설의 등장이다. 지전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것으로 지구의 자전을 뜻한다. 서양 선교자들이 지동설을 이단시하고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우주 체계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지전설이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 서양 천문학의 수용이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이는 우리나라 17세기 천체관을 진일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전설을 처음 주장한 학자는 김석문으로 그의 지전설은 조선 시대 천문 학에서 그의 지전설은 후대 학자들에게 지전설의 논거와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김석문의 우주 체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 천문학 발전사 3] 한국 천문학의 발전사 (고려시대, 조선시대)


지구를 중심으로 부동천인 태극천이 가장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의 천 체 공간이 태허이다. 이 태허가 미동해 그 다음 천인 경성천을 만들어내는데 이 경 성천이 태허 중에 회전 속도가 가장 느리다. 경성천은 2만 4천 4백 40년 만에 태허를 서에서 동으로 일주한다. 경성천 다음이 진성(토성)이며 회전 속도가 점점 빨 라져 29년만에 역시 서에서 동으로 태허를 일주한다. 그 다음 세성(목성)은 12년에 일주하고 형혹은 2년에, 그 다음 일륜은 1년에 태허를 일주한다. 그 다음은 태백(금성)과 진성인데 항상 일륜과 같이 회전하며 그 다음인 월륜은 그 움직임이 더욱 빨라져 1년에 태허를 12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래에 있는 지질(지구)은 그 움직임이 가장 빨라져 1년에 태허를 366회전한다.

이와 같은 김석문의 우주 구조론은 서양 우주 구조론과 우리나라 전통 우주론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부분만을 추출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정립했 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실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지원설을 받아들여 ‘땅은 둥글 다. 그렇다면 둥근 땅 위에서는 어느 나라가 꼭 중앙을 차지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 사대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외에도 홍대용은 그의 문집 ‘담헌서’에 전해지는 ‘의산문답’이라는 글에서 지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주장하였고 이를 근거로 중국의 중화 사상을 부정,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근대적인 우주관과 세계관을 주장 하였다.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 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 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무한 우주론으로 이는 그 이전에는 동 ․ 서양을 막론하고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탈지구중심론이라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과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며 역사학적으로는 조선 시대에 팽배했던 중국 사대주의 를 비판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다는 역사적 의미도 지닌다. 이렇듯 조 선 시대에 서양 천문학의 유입으로 발달한 천문학적 지식은 실학자들이 중국 중심적인 사상을 극복하여 자기 나라와 민족에 눈을 뜨는 데 크게 영향 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천문학이 단순히 유교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실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서양 천문학의 도입은 그 동안 발전이 미미했던 우주 구조론 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논의가 되었던 유교적 우주관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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