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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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천문학



현대과학의 진보는 인간의 끊임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망원경이 발달하기 전의 인류에서부터 우주로 위성을 쏘아 올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하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외의 대상이기도,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가능성의 대상이기도 했다. 문명의 진보가 시작되기 전의 고대시대에 천문은 점성술이나 종교와 연계되며, 우주뿐 아닌 지구의 기후와 자연현상과도 연계되면서 인류의 안녕에 대한 기원과 희망을 담기도 하였다. 르네상스시대 점성가와 천문학자의 구분이 모호한 시기에 라틴어로 그들을 astrologu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단어로 의미는 별자리의 모양에 대한 학문, 즉 점성학을  가르친 것이었다. ‘첨문’이라는 단어는 고대 중국에서 이미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만큼 인류와 오래된 연관을 가지며 지나왔다. 그러나 고대의 천문은 과학적인 원리와 움직임에 대한 증명이나 관측이 아닌 천문현상에 기대어 인간세상의 길흉과 재앙, 복을 알아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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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사람인 아리스타르코스4)는 지구가 하루 한 바퀴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며, 인류 최초 지동설을 주장한다. 그는 태양이 지구보다 거대하며 지구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있다고 추정한 업적을 남긴다. 당시 우주론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원통형 모델로, 정지된 원통형 지구 위 별들이 가득 찬 여러 겹의 친구들이 덮씌워진 형태로, 해, 달,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헬레니즘시대 에라토스테네스6)는 지구의 크기를 처음 잰 사람으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지리학자, 역사가, 철학자였다. 약 200년 뒤 이집트에서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를 저술하면서 천문학 지식을 아우르고 넓히며 1,400여 년 동안이나 최고의 천문학서로 군림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뮤제이온에서 천문학, 점성술, 광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며 해, 달, 행성의 위치 계산법과 월식, 일식의 예측법을 개발하고, 관측기계인 사분의를 고안해내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최대 업적은 ‘천동설’을 확립한 것이며, 그 시대 천문학의 대세가 되었고, 그 위력은 무려 1,000여년 이상 이어져 15세기까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의 신성불가침의 우주론이 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지동설을 다시금 주장하게 된다. 1609년에 그는 자작 망원경으로 달의 수많은 분화구와 계곡과 산이 있는 것을 관측하며 전문적인 천문관측 장비를 사용하게 된다.

국내의 경우 서기 24세기인 고조선시대에 대한 천문지식을 고인들이나 선돌들,  돌방무덤 등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것은 대부분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 신앙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고인들의 방위가 천문방위와 연계되며 남동향의 방위를 가르치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동짓날 해가 뜨는 방향이며, 동지는 후대 동북아시아에서 한 해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는 기준일로 사용된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천문에 대한 관찰을 하였는데, 고구려의 첨성대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신라시대는 경주에 첨성대가 보존되어 있으며,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재되어 있다. 이는 선덕여왕 때 축조된 것이며, 상방하원 (상부는 각이진 네모이고, 하부는 둥근 모양) 높이는 19척 5촌, 상부둘레는 21척6촌, 하부둘레는 35척7촌이다. 중간이상이 위로 뚫려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렸으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준 실물과 일치한다. 백제의 경우 문헌의 기록이나 건축물의 흔적은 없으나, 일본과의 천문역볍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고려시대에 강화도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과 개성 만월대 등이 천문과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개국초기부터 고려의 서운관제도를 답습하였으며, 1420년(세종2년)에 첨성대를 세우고, 경북궁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를 비롯한 10여 종의 천문기기를 제작하고 천문을 관측하였다. 특히 세종대왕 제위당시 조선은 중국의 역법을 받아 날짜를 뽑아서 사용하였는데 중국의 역법은 중국을 기준으로 만든 것으로 위도와 경도가 달라 조선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수많은 전문가를 불러 모아 조선의 정세에 맞는 역법서를 편찬하기 시작한다. 이는 1442년에 완성되어, 1444년에 간행되었다. 이후 1653년(효종4년) 청나라에서 시헌력이 채택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역서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 역법을 통하여 일식, 월식과 날짜, 계절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이 역법을 터득하기 위해 혼천의와 간의와 같은 정밀한 천문관측기구를 직접 제작하게 된 것이며, 한양의 경위도와 동 하지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등 점성술을 뛰어넘는 체계적인 천문관측이 이루어졌다. 또한 국가의 기관으로 1688년(숙종 14년)에는 남구만이 북부 광화방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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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지나면서 인류는 천문에 대한 관측과 더불어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장소를 만들어 가면서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인 하늘을 탐구하는 장소를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의 근대과학이 전 세계에 전해지면서 과학과 공학을 통해 발달한 천문관측장비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장비를 통해 하늘을 관측하는 장소를 천문대라고 하며 그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인류와 매우 밀접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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