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의 혁명 1] 코페르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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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의 혁명 1] 코페르니쿠스



비수아강(江) 근처 토룬에서 출생한 코페르니쿠스는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 밑에서 자랐다.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코프대학에서 철학교수인 불제프스키에게서 수학과 천문 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 항성목 록 사이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에는 교회력의 시정과 항해력 의 개량이라는 두 개의 큰 문제가 미해결로 있었다. 교회력은 율리우스력을 오랫동안 사용한 까닭에 달력에서 춘분 등의 절기가 실제보다 10일 정도 늦게 와서 제례일과 계절이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권위에 관계된 문제가 있었다. 한편, 항해력은 원양항해자가 천문항법을 이용할 때, 천동설을 근거로 계산한 천체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항해에 심각한 위협을 미친다는 문제였다. 코페르니쿠스는 1496년에 외삼촌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 유학, 볼로냐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공부한 다음, 그리스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1497년 3월 9 일에는 황소자리 알파별인 알데바란이 달에 가려지는 성식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모국의 프라우엔부르크성당 평의원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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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에는 로마의 성탄절 행사에 참사회원(參事會員)으로 참석하였고, 약 1 년간 로마에 체류하며 수학․천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이듬해에 귀국하여 다시 이탈리아 유학허가를 받아, 파도바대학에서 의학과 교회법을 익히고, 1506년 두 가지 학위를 받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외삼촌이 본당신부로 있는 하일스베르크에서 빈민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큰 명성을 얻었다. 1512년에 외삼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프라우엔부르크성당의 신부로 취임하였다. 그때부터 야간에 옥상의 망성대에서 스스로 만든 측각기를 이용하여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관측은 정밀하지는 않았으나, 이론가로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행성계의 개념을 구축해 나가기에는 충분했다. 1514년에 파울 주교로부터 교회력의 개정심의를 위한 종교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하였는데, 교황청 공인교리인 천동설에 이의를 다는 것을 피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1516년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겸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이 되어 전임하였고, 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천문학의 혁명 1] 코페르니쿠스


그가 지동설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전4권)는 1525∼153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다만 출판을 주저한 것은 종교적으로 이단자 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는 『천 체의 운동과 그 배열에 관한 주해서』라는 논문을 자비로 출판하여 일부 천문 학자들에게 배포하였다. 그 가운데 1부가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도 전달되어, 1536년에는 쇤베르크주교로부터 본 책의 출판을 권유받기도 하였다. 그가 본 책 출판의 뜻을 굳힌 직접적인 동기는 독일의 젊은 수학자 G.J.레티쿠스의 권 유 때문이었다. 레티쿠스는 1539년에 코페르니쿠스로부터 1년 정도 직접 가르 침을 받고, 스승의 생각을 출판할 것을 간청하였다. 원고가 레티쿠스의 손을 거쳐 세계 최초의 뉘른베르크 활판인쇄소로 넘어간 것은 1542년이며, 이 책의 인쇄견본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전달된 것은 이듬해 5월 24일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지동설에서 유의하여야 할 점은 그가 생각한 태양계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계와는 다르다는 점(그는 행성의 궤도를 원으로 보고,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전원을 사용했다) 과,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증거를 하나도 밝혀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최초의 저서라 할 수 있는 『요약(commentarious)』은 1530년경 완성 된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의 혁명 1] 코페르니쿠스


그는 우주의 구조를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했다.

1. 별들과 그 궤도는 단 하나의 중심을 갖는다. 
2. 지구 중심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다만 달의 궤도와 중력 의 중심일 뿐이다. 
3. 모든 행성은 그 궤도의 중심에 있는 태양의 둘레를 회전한다. 따라서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 다. 
4.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항성천구(별들이 붙어있는 천구)의 반지름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짧다. 
5. 하늘이 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구가 운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구는 매일 그 축의 둘레를 완전히 일주하며, 그 양극(북극과 남극)은 항상 같은 위치에 있다. 
6. 우리 눈에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한 궤도를 돌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7. 행성운동에서 볼 수 있는 유, 역행 등도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창조의 중심이고 인간이 사색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는 고대인이 집념에 대해서, 지구를 한낱 행성으로 생각한 근대인의 사색이었다. 또한 지동설은 과학이 진보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동설은 다른 부문에서의 혁명에 자극제가 되었다. 엥겔스는 역사상 최대의 사상혁신이라 평가하였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지구로부터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빼앗아 그것을 태양으로 옮겼다. 이것은 신 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지구라는 빼앗아 그것을 태양으로 옮겼다. 이것은 신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지구라는 당시의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론을 과학혁명의 기초라고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에 관한 수수께끼에서 새로운 해답을 찾아냈다” 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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