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천문학 발전사 1] 고대 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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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천문학 발전사 1] 고대 천문학사



고대 과학의 발전은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경험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문명은 주로 큰 강 주변에서 농경 사회를 이루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농업과 관계 깊은 계절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천문 관측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화적인 우주 생성론과 생활의 경험에서 유추한 우주관이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오늘날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경향이 있지만 거대한 우주를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한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농경 사회였던 이집트에서는 천체 관측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지구의 적도를 둘러싼 넓은 띠 부분에 존재하는 많은 천체들을 36등분 하였고, 이것과는 별도로 황도에 딸린 별들을 다시 12등분하였는데 이것은 태양과 항성의 상호 위치를 알고 계절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집트 인들은 항성을 관측한 결과를 피라미드의 구조를 설계하거나 역법의 체계를 만드는 데 응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피라미드 밑면의 4개의 변이 정확히 사방을 향하고 있고, 대개 태음력을 사용하는 고대의 역법과 달리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집트의 역법이 그 증거다.


나일강 유역에서 이집트 문명이 발달한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델타 지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초기 문명 중에서 가장 먼저 별과 행성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하늘의 지도도 최초로 작성했다. 그들은 주로 그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과 같은 행성을 오랜 기간에 걸쳐 관측하였고 그 결과, 각 행성들은 천구의 어느 일정한 띠 속에서 각기 독자적인 궤도와 주기로 운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때 행성들 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천구의 일정한 띠를 수대라 하는데 이는 황도의 남북 방향으로 각각 약 8° 정도 너비를 가진 띠 모양의 구역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이 수대를 12등분하여 각각의 구역을 궁이라 불렀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집트인들이 황도를 12등분한 것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황도 12궁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행성 운동에 관한 천문 관측이 가장 정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달력 제작 과 같은 생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700여 년에 걸친 달 관측 결과를 토대로 달이 가득 찰 때와 차지 않을 때를 기준으로 태음력을 고안하여 오랫동안 사용하였고 태음력을 사용했을 때 실제 1년 사이의 기간을 조정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자 윤년을 삽입하여 조절하는 지혜를 발 휘하였다. 1주일을 7일, 1일을 24시간,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눈 것도 그들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관측한 행성의 운행과 달과 태양에 대한 관측 기록 등은 단지 별만이 아닌 모든 천체와 현상을 포함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설명하려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과학적 사고’라 부르는 사고 방법은 그리스 시대에 위와 같은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 봄으로써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전의 나일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점성술이나 역법을 정립하는데 천문 관측을 사용하는 것에서 일진보하여 오늘날의 터키 해안에 위치 한 도시 국가 밀레토스에서 최초로 신화나 종교가 아닌 이성으로 우주를 이 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로는 아주 혁명적인 생각이었고 탈레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탈레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초기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최초의 과학책을 저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하늘에도 관심을 돌려 최초의 천문 학자로 일컬어지며 지구의 모양은 원통형이고 우주 공간에 자유롭게 떠있으며,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고 믿었다. 이후 등장한 아닉시메네스는 지구의 모양의 편평한 원반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비록 이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 많기는 했지만 모든 천문 현상의 원인을 신화나 종교에 근거하여 설명 하던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음을 인정 하였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Astronomy(천문학)의 어원은 ‘별’을 뜻하는 그리스어 astron과 ‘법’을 뜻 하는 nomos가 합쳐진 것으로 그리스 시대에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원 에서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이 우주 만물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학문 이었음이 확인된다. 기존의 자연 철학자들이 사물을 이루는 근본 물질에 대 한 탐구에서 그것을 우주 범위로 확장했던 것과 달리 세상과 모든 자연을 수로써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이루는 근본 물질이 아니라 우주에 내재한다고 생각되는 질서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고,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운 우주를 kosmos라고 명했다(이는 오늘날 우주를 뜻하는 cosmos의 어원이 되었다). 표면상의 모든 점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원을 완전한 도형으로 여긴 피타고라스의 개념은 그 후 오랫동안 후세에 영향을 미쳐 행성들과 그 밖의 천체들이 구형의 지구 주위를 완전한 원을 그리며 돈다는 천동설의 기초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B.C. 340년 경 피타고라스의 개념을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였으며 지구는 거대한 천구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주위를 달과 태양을 비롯해 다른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돈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대부분 상식적인 관찰에 의존한 것이어서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으며 또한 체계적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 의 사후 1000년 이상 동안 과학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가정 하에 지구는 매일 한 번씩 자전하면서 일 년에 한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후에 등장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매우 흡사하여 아리스타르코스를 고대의 코페르니쿠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최초로 삼각 측량법을 이용하여 지구와 달, 태양의 상대적 크기와 거리를 측정하는 등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였으나 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중심설이었으므로 그가 주장한 태양 중심설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지구 중심 체계를 더욱 발전시킨 천문학자인 히파르코스는 천문학의 아버지라 고대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로 간주된다. 지구에서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하는 고정된 이심원의 궤도로 태양의 운동을, 움직이는 이심원의 궤도로 달의 운동을, 주전원의 운동으로 행성의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였다. 이외에도 히파르코스는 고대 관측 기록을 대조, 종합하여 1000여개의 별들을 관측한 뒤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였으며 별들의 밝기를 6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가 분류한 별의 밝기 등급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히파르코스는 천체 운동에 관한 이론 외에도 천체 관측과 측정에 있어 방대한 자료를 남김으로써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역사상 전례가 없는 동, 서양을 합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의 과학과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어지던 지역)의 과학이 합쳐지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 천문학과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역시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메소포아미아 문명이 발달 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천문 관측 기록 자료들이 그리스 천문학에서도 사용되면서 계속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발달한 고대 인도 문명은 자연 현상을 신으로 보는 다신교적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남아 있는 기록으로 살펴보건대 달, 별, 태양 등에 대한 숭배를 찾아볼 수 있으나 행성의 존재에 대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아 천문 관측이 크게 발전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애초에 서방에서 넘어온 천문학이 인도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점성술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부정되어 온 ‘땅이 편평하다’라는 생각은 고대 인도에서 여전히 팽배했었다. 시간적인 면에서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고대 인 도의 우주관은 고대의 다른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그 스케일 면에서 뒤짐이 없지만 독자적으로 발전한 다른 문명과는 달리 고대의 인도 문명은 바빌로니아나 그리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인도의 과학이 서양의 과학과 유기적으로 발달해 왔음을 의미하며 인도 과학은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그리고 이어서 우리나라로 들어왔기 때문에 비단 천문학뿐만이 아니라 전반에 걸쳐 인도 과학은 동서양 과학 교류의 역할을 했다는데 큰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의 천문학 역시 고대 인도의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과학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사산조나 인도의 과학이 이입되고 합성되어 성립된 것 이었다. 인도의 천문표, 페르시아의 천문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 (Almagest)와 같은 저술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천문대에서 천문 관측이 활발히 행하여졌다. 천문표는 천체의 운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슬람의 통치자인 칼리프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천문표를 남기고자 하여 천문대에서는 천문표의 제작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는  그 당시 천문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슬람의 천문학자 알파르가니의 저서 ‘천체 운동 의서’는 12세기에 번역되어 중세 서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슬람 최대의 천문학자라 일컬어지는 알밧타니는 계속적인 관측을 통해 황도 경사치, 회귀년의 길이 등을 상세히 측정하였고 성표를 만들었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우주관이나 혹성 운동론의 진보라는 면에서 보면 뛰어난 공헌은 없었으나, 천문 계산법 분야에서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십자군 전쟁, 시칠리아, 스페인을 매개로 하여 서구로 전파되었는데 이는 이슬람 서적을 번역하여 소개되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천문학을 포함한 이슬람의 문명 및 과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눈부시게 발달한 문화 및 과학 유산과 이슬람에서 이루어진 성 과를 서구 유럽에 전하여 이후의 과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중국 과의 과학 기술 교류를 통해 전해진 중국의 제지술과 직물 기술 등을 유럽 에 전하는 등 이슬람 세계는 동서양 간의 과학 교류에 이바지한 고대 인도 문명과 같이 중국과 유럽을 잇는 문화적 중개지 역할을 하였다. 중국이 몽골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세계와 중국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 했고 페르시아에 일한국을 세운 후라구는 당시 유명한 페르시아인 천문학자 나앗딘에게 천문대를 건설케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였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원래 그리스 천문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중 국의 전통과는 다른 방법으로 천체의 위치나 일월식의 예보를 할 수 있었다. 정밀도에 있어서 중국의 방법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중국의 방법이 지닌 결점을 보충할 수 있어서 당시 높은 평가를 얻었다. 이후 중국에서도 회회사천대라 불리는 천문대가 세워져 이슬람 방식으로 천문 관측 및 역법 계 산이 행하여졌다. 이렇게 얻은 천문 수치를 기초로 수시력이라는 역법을 만들었는데 수시력에 사용된 1년의 길이는 그레고리력과 같은 365.2425일로 매우 정확하였다. 수시력은 이후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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