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의 혁명 2] 티코 브라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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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의 혁명 2] 티코 브라헤


덴마크 귀족 출신의 천재적인 관측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는 코펜하겐 대 학에서 정치가가 되려고 공부를 시작한지 1년만에 일식을 보고 갑자기 천문학 에 관심을 갖기 시작, 그후 평생을 천문 관측에 바쳤다. 그는 육안 관측 천문 학자로는 고대의 히파르코스 이후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브라헤는 1576년 덴 마크왕 프레데릭 2세의 후원으로 벤섬에 '하늘의 도시'라는 뜻의 우라니보르 그 천문대(Uraniborg Observatory)를 직접 설계하여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잘 설비된 천문관측소를 건설하여 그때부터 대략 20년간 망원경이 사용되기 전의 세계 천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관측 기록을 남겼다. 이 천문대는 최고의 관측기구를 갖춘 외에도 연구실, 관측실, 기계 공작실, 침실, 식당 등의 시설이 완비된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천문대로, 건설비도 약 40억 원 정도나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망원경이 출현한 후에 이 천문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17세기 초기에 일어난 30년 전쟁 때 소실되었다.

[천문학의 혁명 2] 티코 브라헤


신성(新星)의 발견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다. 1572년 11월 11일 늘 하 던 대로 하늘을 관측하던 그는 뜻밖에도 카시오페아 자리에 새로운 별이 나타난 것을 발견하였다. 사실상 신성은 새로운 별이 아니라 어떤 별이 폭발하여 광도가 최고도로 증가한 것으로서, 폭발 전에는 빛이 약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므로 망원경이 없던 당시에는 틀림없이 이 별은 새로 생긴 별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금은 신성의 출현이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서구에서 처음 관측된 신성이었다. 브라헤는 이 별을 '티코의 신성'이라 이름 붙였으며, 이것에 관한 최초의 저서로 『신성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새로 발견된 이 별은 발견 직후 금성 정도로 밝았으나 점차 빛을 잃고 1574년 사라 졌다. 그는 처음에는 빛깔이 흰색이던 것이 점차 노란색,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관측하였고, 또 이 별이 토성보다 훨씬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써 『천상계는 불변』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근본적으로 동요시켰다. 브라헤는 또한, 1577년 혜성을 관측하고 혜성이 달 아래 세계에서 일어나 는 현상이라고 믿어왔던 당시의 생각과는 달리 훨씬 더 먼 천상계에서 운동하며 원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그린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천문학의 혁명 2] 티코 브라헤


티코 브라헤는 지구 중심설을 주장하고 태양중심설에 반대한 최후의 천문학 자였다. 그러나 혜성에 관한 저서 속에 절충안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은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행성을 바짝 당기면서 우주의 중심인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독자적인 우주 체계였다. 그의 우주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에서 코페르니쿠스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근대 천문학 형성에 이바지한 셈 이다. 브라헤는 수년간에 걸쳐서 정확한 관측을 계속하였는데, 그 정확성은 육 안으로 볼 수 있는 극한까지 이르렀고,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은 관측으로는 가장 정밀하였다. 그는 당시까지의 천문 관측의 기록을 대부분 수정하였고, 행 성 중에서도 특히 화성을 비할 바 없이 정확하게 관측하였다. 이처럼 천문 관 측이 정밀해져서 달력을 개정할 수 있게 되자, 마침내 그레고리 13세의 후원으로 달력이 개정되었다. 1601년 브라헤는 "나의 생애가 헛되지 않았다면 그 것으로 만족한다"[35] 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정밀한 관측 기록을 고스란히 인계받은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기록을 계산하는데만 4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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