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의 혁명 3] 요하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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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의 혁명 3] 요하네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에 천연두를 앓는 등 육체 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17세에 아버지가 전상으로 죽자,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 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594년 그라츠대 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점성력의 편수를 위촉받아 일하면서, 그 해 겨울의 강추위와 전쟁을 예고한 것이 적중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 1595년 천체력을 발간하고, 이듬해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여 행성의 수와 크기, 배열간격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티코 브라헤와 갈릴 레이를 알게 되었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므로 신교신자 인 케플러는 구교파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 후 1600년 그라츠대학을 떠나 프라하로 옮겨 브라헤의 제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으며, 화성(火星)의 운행을 관측하였고, 브라헤가 16년간에 걸쳐 연구한 화 성 자료를 브라헤의 임종시 인계받았다. 1601년 브라헤의 후임으로 궁정의 수학자가 되었다.

[천문학의 혁명 3] 요하네스 케플러


그 후 행성들의 합을 연구하던 중에 땅꾼자리에서 초신성(케플러신성)을 발 견하였다(1604). 1609년 화성관측 결과를 『신천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 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을 발표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 전시켰다. 또한 운동의 기인으로서 태양의 자전에 따른 자기적 추진력을 제안 하였다. 1611년에는 천연두로 아내와 한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굴절  광학 』을 저술하여 케플러식 망원경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1612년 루돌프 2 세가 죽어 더 이상 궁전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린츠대학의 수학교수 겸 측량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9년 『우주의 조화 』를 출판하여, 행성의 공전주기와 공전궤도의 반지름과의 관계를 설명한 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 하였다. 1626년 종교전쟁을 피하여 울름으로 이전하였고, 다음해에 로그를 사 용하여 행성의 위치를 계산한 ‘루돌프표’ 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원양 항해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1628년 발렌슈타인 후작의 전속 점성술사가 되어 슐레지엔으로 거처를 옮겼다. 1630년 11월 15일 길에서 급사하였다.

케플러가 브라헤의 행성관측 결과로부터 경험적으로 얻은 행성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① 제 1법칙 :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공전 한다. 
② 제 2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동경은 같은 시간에 같은 넓이를 휩쓸며 지난다. 즉, 행성의 속도와 그 동경이 그리는 넓이의 곱은 항상 일정하다. 
③ 제 3법칙 :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공전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제1법칙과 제2법칙은 주로 화성을 관측하여 얻은 것으로, 1609년에 발표되었고, 제3법칙은 이보다 10년 후에 발표되었다. 케플러가 발견한 세 법칙은 여러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결국 아무 차별 없이 일률적으로 단순하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전통적 위계사상에 동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우주는 절대자의 의도나 섭리에서가 아니라 이 법칙에 의해서 질서가 잡힌 다는 것이므로 목적론 사상을 후퇴시키는 대신 기계론 사상의 승리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우주는 위계적인 것도 이질적인 것도 아닌 동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점차 다른 분야에까지 침투하여 중세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동요시켰다. 특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 행성 중의 하나의 행성에 불과하다는 사상이 대두됨으로써 우주를 보는 인간의 시야가 넓어졌다. 특히 이 법칙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대수가 천문계산에 이용되고, 그 결과를 수식으로 표현한 점은 자연의 연구방법을 개선하는데 일익을 담당 하였다.

[천문학의 혁명 3]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의 시대는 그 때까지 사람들이 믿어온 천동설에 대해 지동설이 도전 하던 시기로, 브라헤는 원래 천동설을 옹호하려고 행성의 위치를 측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케플러는 비록 브라헤의 제자였지만, 지동설의 입장 에서 지구의 공전궤도를 원이라 가정하고 화성의 공전궤도를 기하학적으로 작도해 본 결과, 그 궤도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케플러 이전에는 지동설의 주장자들도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케플러의 법칙은 후에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데 핵심적인 수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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