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천문학 발전사 2] 중세 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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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천문학 발전사 2] 중세 천문학사



고대 서양에서는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큰 진전을 보인 반면 중세 시대에는 중세 사회를 지배한 기독교에 눌려 이론적인 과학의 발전보다 실용적인 기술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진다. 시계, 나침반, 화약 등이 개발되었고 중국에서 전해진 제지술과 인쇄술 등은 과학 기술 분야의 경험적 지식이 축적되는 것을 가능케 하여 후에 과학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하였다. 이슬람 문화권과의 접촉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종교로 인해 억눌렸던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이슬람에서 출간된 과학 서 적들을 번역하여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지속되었고 이러한 노력들은 유럽인들이 고대 그리스의 과학 전통을 이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서양 천문학 발전사 2] 중세 천문학사


시장 경제가 발달하고 실용적인 과학 기술이 발달했던 중세 시대에 실험 과 수학과 같은 합리적인 방법이 새로운 자연 과학 연구 방법으로 각광받기 시작할 무렵 문예 부흥 운동과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 쳐 큰 영향을 미쳐서 중세 시대에 억눌려 있었던 그리스 사상을 되살림으로 써 자연 과학 발달의 토대를 다지게 했다. 특히 이 시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여러 예술 분야에 걸쳐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연 과학과 기술 전 반에 걸쳐서도 업적을 남겼는데 그만의 독창적인 연구 방법은 후에 이어지는 갈릴레이 과학 혁명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빈치는 생물 학, 과학, 역학 등과 같이 자연 과학 거의 전 영역에 걸쳐 연구를 하였는데 다빈치가 전 생애를 통해 연구한 자연 연구의 최종적인 종합 산물은 우주론이었다. 그의 우주론은 통칭 ‘눈에 보이는 우주론‘이라 일컬어지며 예술가였던 그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자연 전반에 관한 관찰, 실험, 성찰을 통해 얻어진 모든 인식의 종합적 통일에 이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시작된 유럽인들의 전반적인 세계관 변화가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어나면서 자연에 대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일어났고, 이를 후세 사람들은 과학 혁명이라고 부르게 된다.

[서양 천문학 발전사 2] 중세 천문학사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시대에 부활한 그리스 사상의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태양 중심설의 영감을 떠올리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에서 지구는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며,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달은 지구 주위를 회전하며, 항성 천구는 회전하지 않으며 행성구보다 태양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명제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이미 제안한 바 있는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생각해볼 때 코페르니쿠스의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대담하고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지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1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해온 아리스 토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힌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평 가받고 있다. 확실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기존의 가치관을 허물만한 요 소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새롭지도, 합리적인 것도 아니 어서 다음 세대의 천문학자인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에서 오히려 후 퇴, 수정 천동설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브라헤의 체계는 코페르니쿠스보다 덜 파괴적이어서 교회의 옹호를 받았고 이는 중국으로 건너간 선교사들에 의해 동양, 우리나라에까지 전파가 되었으므로 우리나라 천문학사에 는 큰 의미를 가진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아리스토 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혔다면 브라헤는 천체를 관측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혔다. 그가 지속적인 관측을 통해 밝혀낸 혜성의 궤도와 신성의 발견은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거나 없어질 수 없다고 강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브라헤의 정밀한 천체 관측 자료를 넘겨받은 케플러는 1609년 발간된 그의 저서 ‘신천문학’에서 ‘타원 궤도의 법칙’과 ‘면적 속도의 법칙’을 발표함으로써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인 ‘원궤도’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천체의 운동을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에 의해 정의하려는 고대 그리스 이래 계속되었던 천체 운동학의 과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기념비적인 업적 이었다. 10년 뒤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 제곱이 태양과 행성 간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수 신비주의에 심 취해 있었던 케플러가 자신의 손으로 원 궤도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서양 천문학 발전사 2] 중세 천문학사


천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의 완전한 몰락은 갈릴레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목성에 천구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음을 증빙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의 체계에서는 물리학과 천문학이 별 개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이었고 우주는 각각의 공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동질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종래의 태양 중심 구조를 뒤엎는 지구 중심 구조를 제안하면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과학자 들은 이에 부응, 기존 역학 이론이 전면적으로 수정되게 된다. 이때 놀라운 업적을 남긴 과학자로는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등이 있다. 이렇듯 중세 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대에는 과학에 대한 긍정적 사고 및 전망과 거기에 서 파생된 풍성한 과학적 성과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과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비약적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지식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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